마이산의 남쪽 공원 입구에는 단군과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고종 등의 왕과 조선의 유림 41위,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순국한 34명의 선열 등을 모신 이산묘(餌山廟)가 있다.
대한제국 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유림의 태두였던 최익현 선생과 송병선 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분연히 민족혼을 일으켰다. 조선 태조가 머물렀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황단을 쌓아 위업을 기리는 한편, 친친계와 현현계를 조직하여 창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국운을 다시 세우고자 지역의 선비들과 힘을 모으고 호남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시대 명현과 을사조약 이후 순국선열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으며, 이산묘 건너편 암벽에는 고종황제의 어필과 백범 김구 선생의 대형 친필 '청구일원 대한건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산묘의 현판은 성제 이시영(임시정부 부통령) 선생의 휘호이며, 영모사의 현판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휘호이고, 영광사 현판은 백범 선생의 친필이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대한광복기념비'도 남아있다. 이산묘는 이 고장 민족 광복의 성지이다.
최초 창건한 1925년에는 이태조와 조선말의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을 모시고 이산정사(餌山精舍)라 칭하였다. 그 후 1946년 단군과 세종대왕을 모셔 이산사(餌山祠)로 개칭하였으며 이후 조선 개국이래 유명유림 40위와 고종, 을사년 이후 순국한 선열 33위를 모시고 1948년 이산묘(廟)로 개칭하였다.
이산묘는 현재 네 명의 임금과 조선의 명현, 순국열사 의사 79위를 모신 국내 최대의 사당이다.
이성계는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금척몽을 꾸었고 연재와 면암선생은 여러 차례 마이산을 방문했고 특히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는 등 마이산은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 여겨 마이산에 이산묘를 지었다 한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한 이석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전북 각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마침내 1907년 9월12일 마이산 용암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출정식을 거행하였다.
용바위에서 출정식을 가진 호남의병은 9월13일 진안읍을 기습하여 1년 여 만에 진안읍을 왜적으로부터 수복하였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은 2년 여 동안 진안·용담·장수·임실·전주·순창·광주·곡성·남원·운봉·함양 등지를 누비며 왜적과 크고 작은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나옹스님의 수행오도처이며 역사 속에서 수행자들의 기도처였던 고금당(나옹굴)은 전봉준 장군의 장녀가 피신해오자 당시 금당사 주지스님께서 10년 동안 귀머거리 벙어리 행세하라며 숨겨 주어 화를 모면하게 했던 동학의 연관지이기도 하다.
다음은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싶은 석학을 위해 마이산도립공원 자료를 자세하게 인용한 것이다.
마이산은 이 고장이 자랑하는 명승이다.
여기에 조선 태조가 마이산에 머물렀던[駐蹕] 사실이 야사(野史)에 전해오고 1907년에는 의병들이 모여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국권수호의 유서 깊은 곳이 이산묘다. 한말의 거유(巨儒)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선생이 한때(마이산 용암에'庚子 8月'로 각자되어 있음을 보아 1900년에 해당) 이곳을 유람할 때 많은 사람이 추앙하며 따랐다.
한편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勉菴) 최익현(催益鉉) 선생도 1906년 성수면 도통리 목동 최제학(崔濟學)의 삼우당(三友堂)에 머물면서 고을을 유람하기도 했다. 고을 사람들은 두 분을 크게 공경하고 숭배하여 송병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친친계를 만들고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현현계를 만들었는데 1924년 여름 친친계와 현현계를 합하기로 하고 "조선 태조가 마이산에 왔던 사실과, 연재(淵齋)·면암(勉庵) 두 분이 머물렀던 곳이니 현인을 존경하는 뜻이 없을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와 기념사업을 하기로 뜻을 모아 기금을 걷어 이듬해인 1925년 3월 이산정사를 건축하였는데 모두 4칸으로 서쪽은 인지재(仁知齋), 동쪽은 여택헌(麗澤軒)이었다.
집 한 채를 정사의 뒤에 더 지어 고경각(高景閣)이라 하였으며 건물 전체를 이산정사(駬山精舍)라 하였다. 정사 맨 위에 또 집 한 채를 지어 회덕전(懷德殿)이라하고 조선 태조를 제사 지내려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 갖은 탄압과 우여곡절을 겪다가 1945년 광복이 되고 이듬해인 1946(丙戌)년 광주(光州), 나주(羅州)를 비롯한 여러 향교의 의견을 좇아 회덕전에는 단군과 태조 및 세종 세 분을 모시게 되었고, 회덕전 아래 두 사우(祠宇)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永募祠)로 조선조 명유(名儒) 41위를 모시고, 서쪽은 영광사(永光祠)로 1905(乙巳)년 이후에 순국하신 선열(先烈) 34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처소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사우(祠宇)를 중수할 기금이 없어 회덕계(懷德契)를 만들어 기금을 모으고 특히 영모사의 본 손(本 孫)은 각기 성금을 내어 1947년 9월 12일에 준공하였다.
고종황제의 위판(位版)은 애초 옥구군(현 군산시) 해종전(海宗殿)에 있었는데 일제하에 훼철(毁撤)을 당하여 임시로 전주의 건지산(乾止山) 속에 봉안하였다가 전주 유림들이 회덕전에 봉안하기를 제안하여 1948(戊子)년 가을 회덕전에 옮겨 봉안하니 회덕전 위판이 모두 4위가 되었다.
이산묘는 처음 이산사(駬山詞)로 칭하였으나 성균관에서 임금의 위판을 모신 곳이니 사(祠)가 아니라 묘(廟)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이산묘로 개칭하였다. 여기에 백범 김구 선생이 "大韓乾坤靑邱日月" 여덟 자를 크게 써 주어 묘의(廟) 건너편 서쪽 암벽에 새기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대한광복기념비(大韓光復記念碑)를 묘의 동쪽에 세웠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산묘 외삼문에는 1949년 이산묘 원장으로 추대된 이시영 당시 부통령의 친필각자 '駬山廟' 현판이 걸려 있으며, 영모사의 현판은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의 글씨로 각자 되었고 영광사의 현판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글씨를 각자한 것이라고 한다. 이산묘는 2004. 7. 30 전라북도지방기념물(사적) 12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