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무상이 세운 천년사찰로 금당사(金堂寺), 고금당(古金塘), 혈암사(穴巖寺), 금동사(金洞寺)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백제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의 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는데, 한때 고려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도 이곳에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금당사가 보유한 지정문화재로는 괘불탱(보물 1266호), 목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18호), 석탑(전북문화재자료 122호) 등이 있고,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한 괘불각, 나한전, 삼성각, 지장전 등이 있다. 특히 보물 1266호인 거대 괘불탱화는 폭 4.74m, 높이 8.70m나 되는 거대한 의식용 불화로, 관음보살상을 단독으로 그렸는데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으며 화려한 장식과 문양의 옷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당하게 한다. 불화를 그리는 화원 스님 4명이 제작한 이 괘불은 화려한 채색과 은은한 무늬 등 17세기(숙종 18년) 당시 불화의 대표적 특징을 잘 표현하였으며 통도사관음보살괘불탱화, 무량사미륵보살괘불탱화와 함께 보살괘불탱화의 최고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금당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 뒤 1978년에는 명부전, 1987년에는 산신각, 1990년에는 극락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나한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은 동구나무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있는데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고 최근 조성된 대형탑이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마이산 암마이봉 절벽 바로 아래에 있는 사찰로 불가사의한 돌탑들이 부처님과 법당과 줄사철나무 군락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신비하기 그지없는 사찰이다. 진안군수를 비롯 많은 지식층들의 염원과 지원을 받아 쓴 소설 『금척』에 의하면 무학대사의 풍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나온다.
탑사 맨 꼭대기에 천지탑이 있는데 그 지점이 기가 북으로 용출하는 곳이며 활시위를 당겼을 때 화살의 시작점인 활살날개 부분이라고 한다. 그 부분에 탑을 쌓아 비보를 하면 용출하는 기를 막아 진안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압할 진, 누를진자 진안(鎭安)이 되었나 보다.
탑사의 축조자로 알려졌고 하얀 수염의 석상이 있는 이갑룡 처사가 마이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거주하면서 돌탑들을 쌓고 정비하며 점차적으로 탑사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당시는 절 이름도 없었으나 예로부터 많은 탑들이 자리했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80여 기의 탑이 남아 있어 불가사의하게 쌓여있는 돌탑의 영험함을 보기위해 찾아드는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봄가을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신비의 돌탑단지를 찾아드는 관광객들에 의하면 탑사를 한국의 불가사의 1호라고 지칭한다고도 한다.
1980년 한국 불교 태고종에 사찰 등록했으며,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었다. 탑사의 시설물로는 대웅전, 산신각, 영신각과 천지탑, 오방탑, 일광탑, 월광탑, 중앙탑 등의 탑과 미륵불, 종각, 이처사 좌상 등이 있다.
은수사는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단 소속으로 숫마이봉 바로 밑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이라 했다.
"正"은 5획으로 오행, "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이란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920년에 증창되었고 은수사로 개칭되었다.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 의하면 은수사란 이름은 태조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렇듯 은수사는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장군시절과 역사가 깊다. 이성계의 기도처였고 기도가 끝나고 먹고 심었다는 청실배나무가 고목이 되어 지금도 맛좋은 배를 주렁주렁 열어내고 있고 그 앞 도량에서 매년 군민의 날에 천제와 함께 금척무 시연이 진행되고 있다. 수마이봉 바로 밑에 나라에서 제를 올리던 천제단이 있고 천제단 바로 아래에 인접해서 은수사가 있다. 은수사는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각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고 있고 은수사에는 제작당시 국내 최대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
한편 은수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이산 줄사철군락이고(천연기념물 380호), 또 하나는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386호)이다. 청실배나무 근처에는 그릇들이 놓여 있는데 역고드름을 보기 위함이다. 역(逆) 고드름은 마이산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은수사 쪽에서 가장 두드러진다.